

이성낙(76) 가천대 명예총장은 1960년대 독일 뮌헨의대 유학시절, 인상 깊은 수업을 들었다. 세계피부과학회장이던 알프레드 마르치오니니(1899~1965) 교수의 강의였다. 주제는 ‘미술품에 나타난 피부 질환’. 의술과 예술을 접목한 마르치오니니 교수는 그의 인생 행로에 영향을 미쳤다. 내과를 지망하던 이 총장을 피부과로 이끌었다.
그로부터 50년, 이 총장은 다시 학생으로 돌아가 평생 천착한 이 주제로 명지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논문 ‘조선시대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 병변(病變)’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일 학위수여식에 젊은 학생들과 나란히 선 이 총장은 “조선시대 초상화 519점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그 역사적 의미와 사회성을 꿴 것이 보람 있다”고 말했다.
전국 박물관과 미술관을 이 잡듯 뒤지며 초상화 자료 모으기에 발품을 판 결실이다. 이미 국제적인 피부학 전문 학술지에 ‘초상화에 나타난 백반증’ 등 논문으로 이 분야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이 총장은 “조선시대 초상화가 얼마나 사실에 근거해 정확하게 묘사됐는지를 과학적으로 인증 받아 기뻤다”고 회고했다.
조선 초상화 519점을 분석한 결과, 이 총장은 각기 다른 20가지 피부 증상을 발견했다. 무모증(無毛症)과 백반증(白斑症), 기타 사시(斜視) 등이다. 특히 14.06%에서 천연두 반흔이 나타나 조선시대에 천연두가 얼마나 무서운 전염병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대표 예가 1872년 그려진 태조의 어진(御眞)이다. 이마 부위에 피부병변인 작은 혹, 모반(母斑)이 드러나 있다. 조선을 개국한 왕의 초상화에도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원칙이 예외없이 적용된 것이다.
마지막 어진 화가 채용신(1850~1941)이 1911년 그린 ‘황현 초상’도 사시를 적확히 그렸다. 1796년 이명기와 김홍도가 공동제작한 ‘서직수 초상’에는 얼굴 왼쪽 볼에 색소모반(色素母斑) 3개가 드러나 있는데 그중 하나에 털 오라기 3개가 선명하게 묘사돼있다. 희귀한 군집모(群集毛)다. 이 정도로 세밀한 ‘확대경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하지만 조선처럼 전염성 강한 천연두가 큰 사회문제였던 17~18세기 중국과 일본 초상화에는 반흔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 초상화와 다른 점이다. 이 총장은 여기서 중요한 결론을 얻는다. 조선 화원들은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초상화를 그린 반면, 중국과 일본 화원들은 ‘있는 데도, 못 본 듯’ 그렸다는 것이다. 또 하나, 이런 초상화에 나타난 일종의 ‘외모 장애자’들이 대부분 높은 관직에 올랐다는 사실에서 조선 선비사회의 포용성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총장은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조선의 시대정신을 보았다”고 말했다.
평생 수집한 동서양의 초상화 자료목록을 공개하며 이 총장은 후학들이 더 분발해주길 부탁했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정재숙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