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허 스님의 선방일기.
지허 스님
날이 풀어지는 듯하다 다시 세찬 바람과 함께 몸이 오싹해진다. 그동안 춥다는 핑계로 참선을 게을리 했는데, 3월 들어 몸과 마음을 다잡으려고 선방일기를 찾았다. 비록 몸의 건강을 위해 수행하는 것이지만, 참다운 참선을 이 책에서 맛본다. 그동안의 반성인지, 아니면 함양 가까이 계신 분들 중 참선을 함께 하실 분이 있으면 하는 마음에선지 이야기가 길어졌다.
"옛날 어느 도반이 주석하고 계시는 토굴을 찾아 두 납자가 발길을 재촉했다오. 그런데 그 토굴에서 십리쯤 떨어진 개울을 건너려고 할 때 시래기 잎이 하나 떠내려오더래요. 그러자 두 납자는 발길을 멈추고 이렇게 중얼거리더래요. '흥, 도인은 무슨 도인. 시래기도 간수 못하는 주제에 도는 어떻게 간수하겠어. 공연히 미투리만 닳게 했구려.' 하면서 두 납자가 발길을 되돌려 걷자 '스님들, 스님들, 저 시래기 좀 붙잡아 주고 가오. 늙은 이가 시래기를 놓쳐 십리를 쫓아오는 길이라오.'"
선방 생활과 병영 생활은 피상적인 면에서 극히 유사한 점이 많다. 출진을 앞둔 임전태세의 점검이 무인武人의 소치라 하면 결제에 임하기 위한 제반 준비는 선객의 할 일이다. 개인의 장비라야 의류와 세면도구, 몇 권의 불서佛書 등일 뿐이다. 바랑을 열고 내의와 양말 등속을 꺼내어 보수하면 끝난다. 삭발하고 목욕을 마치면 물物적인 것은 점검이 완료된다.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영원하다. 물질의 형태에서 보면 영원성은 부정되고, 물질의 본성에서 보면 영원성이 긍정된다. 영원성을 부인함은 인간의 한계 상황 때문이요, 영원성을 시인함은 인간의 가능 상황 때문이다. 영원성을 불신함은 중생의 고집苦集 때문이요, 영원성을 확신함은 불타의 열반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성을 배제하고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개발하여 저 눈 속에서 탄생의 기쁨을 위해 조용히 배자胚子를 어루만지는 동물처럼, 얼어붙은 땅 속에서 배아胚芽를 키우는 식물처럼 우리도 이 삼동에 불성을 개발하여 초춘初春엔 기필코 견성하도록 하자. 끝내 불성은 나의 안에 있으면서 영원할 뿐이다.
<동안거 시간표> 오전 2시 30분 기침 오전 3시~6시 참선(입선 및 방선) 오전 6시~8시 청소, 아침 공양, 휴게 오전 8시~11시 참선 오전 11시~오후 1시 점심 공양, 휴게 오후 1시~4시 참선 오후 4시~6시 저녁 공양, 휴게 오후 6시~9시 참선 오후 9시 취침
잘 따지고 보면 납자는 철저하게 욕망의 포로가 되어 전전긍긍한다. 세속인들이야 감히 엄두도 못내겠지만, 생사 문제까지 놓아 버리고 부처가 되겠다는 대욕에 사로잡혀, 심산유곡을 배회하면서 면벽불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다. 무욕無慾은 대욕大慾이기 때문일까.
선객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이다.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이자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것이지만, 운명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다. 그래서 숙명은 필연이지만 운명은 당위요, 숙명이 불변이라면 운명은 가변이요, 숙명이 한계성이라면 운명은 가능성을 의미한다. 내가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하고 거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숙명의 소산이라면 내가, 자라서 갑부가 된 것은 운명의 소조이다.
날카롭게 번쩍이는 삭도削刀가 두개골을 종횡으로 누비는 것을 바라볼 때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머리카락이 쑥쑥 밀려내릴 때는 시원하고 상쾌하다. 바라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 때문이다.
중생이 시는 세상에서 시비란 가릴 수 없다. 왜냐하면 중생이 바로 시是와 비非로 구성된 양면적인 존재니까.
선객에게 화두 다음으로 끈질기게 붙어다니는 생각이 있으니 그것은 식사食思즉 먹는 생각이다. 출가인은 욕망의 단절 상태에 있지 않고, 외면 내지는 유보 상태에 있을 뿐이라고 이 식욕은 강력히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 바로 식본능이라고 알려 준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절망적인 공포가 바로 기아에서 오는 공포라고 결론 지어준다. 인간의 복수심과 승리욕은 자기 밖에서보다 자기 안에서 더욱 가증스럽고 잔혹하다. 별식은 넉넉히 장만하여 제한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기 양대로 받는다. 주말에 무척이나 고달픔을 겪은 선객들이라, 위의 사정은 아랑곳 않고 발우 가득히 받아 이제까지의 주림에 대한 복수를 시원스럽게 한다. 통계에 의하면 선객의 9할이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위장병 환자라 한다. 식본능에 무참히 페베당한 적나라한 실상이다. 노년에 이르도록 견성하지 못한 선객은 만신창이가 된 위장을 어루만지면서 젊은 선객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뒷방 신세를 지다가 마침내는 골방으로 쫓겨가서 유야무야 사라져 간다. 그래서 선객은 이중으로 도박을 한다.세간(인생)에 대한 도박, 출세간(승가)에 대한 도박.
"본능을 억제한다고 해서 반드시 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객에겐 필요 조건과 충분 조건이 있지요. 분능 억제는 필요 조건에 해당되고 견성은 충분 조건에 해당되겠지요. 필요 조건은 수단과 같은 것이어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본능 억제가 하나의 수단이라면 그 역逆인 본능 개발도 또한 수단이 되겠지요. 필요 조건인 본능 억제가 없더라도 충분 조건인 자성이 투철하면 견성의 요건은 충족되겠지요."
겨울철에는 구워먹는 상원사의 감자맛은 일미逸味다. 선객의 위 사정이 가난한 탓도 있겠지만 장안 갑부라도 싫어할 리 없는 맛이다. 군불을 땐 아궁이에 꽃불이 죽고 알불만 남으면 고방庫房에서 감자를 몇되박 훔쳐다가 아궁이에 넣고 재로 덮어버린다. 저녁에 방선放禪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날 감자구이 담당 스님이 아궁이로 감가를 꺼내려 간다. 뒷방에서는 공모자들이 군침을 흘리면서 기다린다. 감자는 아궁이에서 몇 시간 동안 잿불에 뜨뜻하게 잘 구워졌다. 새까만 껍질을 벗기면 김이 모락모락 오른다. 맛은 틀림없이 삶은 밤맛이다. 서너 개 먹으면 허기가 쫓겨간다. 잘 벗겨 먹지만 그래도 입 언저리가 새까맣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는다. 스릴도 있고 위의 사정도 좋아지니 여유가 생겨서다.
달포가 지나니 선객의 우열이 드러났다. 선객은 화두와 함께 살아간다. 화두란 공안公案인데 철학의 명제命題, 논리학의 제재題材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선방에 앉은 선객이 유의하면 유의할수록 화두에 대해서 분석적이다. 유무가 단절된 절대무의 관조에서 견성이 가능하다는 선리禪理를 납득하려고 하면 할수록, 현존재인 육체의 유무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방의 연륜을 더해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식과 함께 분석이 떠나가고 그 자리에 무식과 함께 화두가 들어있음을 알게 된다. 이때 비로소 선객이 되는 것이다. 선객을 끌고가던 화두는 마침내 선객을 백치가 아니면 천재쪽으로 끌어놓는다. 백치는 백치성 때문에 고통에서 해방되고 천재는 천재성 때문에 번뇌에 얽매인다. 그래서 대우大愚는 대현大賢이 되고 대고大苦는 대탈大脫이 된다.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보다 더 추해진다.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鄙陋와 비열卑劣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맨다. 그는 이미 선객이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 폐물이 되고 만다. '신외身外가 무물無物', 차원높은 정신성 속에서 살아가는 선객일수록 유물적이고, 속한俗漢적이라고 타기할 게 아니라, 화두 다음으로 소중히 음미해야 할 잠언이다.
용맹정진의 마지막 고비다. 저녁이 되니 뼈마디가 저려오고 신경이 없는 머리카락과 발톱까지도 고통스럽다. 수다는 전신의 땀구멍으로 쳐들어온다. 화두는 여우처럼 놀리면서 달아나려 한다. 입맛은 소태 같고 속은 쓰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큰 대자로 누우면 이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만사후의萬事休矣다. 고행의 극한 상황들을 연상해 본다. '설산에서 6년간.' 눈이 떠지고 허리가 퍼진다. 얼마가 지나면 또 눈이 갑겨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골고다의 십자가.' 눈이 뗘지고 허리가 펴진다. 그러나 얼마가 지나면 다시 눈이 감겨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그러다가 비몽사몽간에 뒷방에서 잠자는 스님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번쩍 뜨인다. 수마도 고통도 물러갔다. 화두가 앞장 서며 빨리 가잔다. 길은 멀고 험하지만 쉬지 않고 가면 된다면서.
경책은 세 번까지 주어지는데 그래서도 효과가 없으면 그만이다. 세 번 이상의 경책은 군더더기요, 중 노릇은 자기가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두 만들기 울력이 시작되었다. 장난기가 많은 스님들은 언제나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기회만 오면 갖은 방법으로 장난기를 발휘한다. 만두를 여자의 그것을 흉내내어 오목하게 빚는가 하면 남자의 그것을 흉내내어 기다랗게 빚기도 한다. 극히 희화적이다. 성 본능이 억제된 상황에서의 잠재 의식의 발로라고나 할까. 그래서 종교적인 미술일수록 남녀의 뚜렷한 선을 투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느지도 모른다.
세모歲募는 날 일깨우면서 돌아다보라고 한다. 인간은 직립이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것이 아니라 지나간 날을 돌아보고 비쳐볼 줄을 아는 의식의 거울을 가졌기에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세모는 나에게 알려 온다. 이제 한 해의 시간은 다 가고 제야除夜가 가까왔음을 그러면서 타이른다. 한 해의 것은 한 해의 것으로 돌려 주라고, 그러면서 마지막 달력장을 미련없이 뜯어버리고 새 달력장을 거는 용기를 가지라고.
어제는 세모에서 허전하다 하겠지만 오늘은 정초인데 웬일일까. 고독감이 뼈에 사무치로독 절절하다. 세속적인 기분이 아직도 소멸되지 않고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고개를 치민다. 이럴 때마다 유일한 방법은 화두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객은 모름지기 고독해야 한다. 고독 속에서 고독을 먹고 고독을 노래하면서도 끝내 고독만은 낳지 않으려는 의지가 바로 선객의 의지이다.
"평범한 인간들은 시간을 많이 먹을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빈곤해지고, 분발없는 스님들은 절밥을 많이 먹을수록 그것으로 인해 점점 나태와 위선을 쌓아가게 마련이지요. 나아가지 못할 바에야 제자리 걸음이라도 해야 할 텐데..."
마음고요마을 책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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