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수행의 깨달음과 심리치료
최 훈 동 (한별정신병원장/서울대 초빙교수)
1. 들어가는 말
정신적 위기의 근저에는 아직 검토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거기엔 과거의 잔재들이 풀려 나와 진정 무엇이 중요한지 발견할 것을 요구하는 자기실현의 강력한 힘이 있다. 이것은 오랫동안 소홀히 해온 내면의 요구를 자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Jung은 1933년 개성화(individuation)라는 표현으로 이를 구체화한 바 있다. 명상과 심리치료의 출발점은 인간의 고통이다. 인간은 상호 의존된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의 능력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부적응과 부조화로 인한 내적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갈등은 부모와 최초 관계에서 형성된 경우가 많고 이 최초의 양식으로부터 비롯된 갈등은 개인의 정신건강을 흔들어 갖가지 고통을 낳게 되고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므로 고통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양육자로서 부모와 심리 교정을 수행하는 치료자의 성찰되지 않은 분노나 욕망은 아동과 환자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부모와 치료자가 갖추어야 될 조건 가운데 덕성이나 품성과 같은 인격적 자질에 덧붙여 이와 같은 성찰되지 않고 자각되지 않은 분노와 욕망을 다스리는 핵심적인 방법은 자각으로서 통찰이다. 이런 견지에서 명상 가운데 가장 정교한 이론체계를 갖춘 불교 명상의 깨달음과 정신치료의 통찰을 비교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하겠다. 이들은 각각 동양과 서양의 전통을 대변하여 방법도 다르고 그 깊이도 각각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이를 면밀하게 비교하여 보는 것은 수행자나 치료자의 교육과정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 하겠다.
2. 명상수행의 깨달음
붓다는 번뇌가 완전히 제거된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환자로 보고 있다. 불교의 수행(bhāvanā)은 정신적인 번뇌들을 제거함으로써 마음을 정화시키는 심리치료의 본질을 가진다. 붓다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 후 처음으로 가르친 내용은 사성제(고苦 집集 멸滅 도道)이다. 즉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 압축된 것이다. 사성제는 고성제(苦聖諦)로부터 시작한다. 고성제는 문제의 자각이자 깨달음의 시작이다. 괴로움이 없는데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도성제(道聖諦)는 괴로움을 해결하는 길(방법)로서 여덟가지 바른 길(八正道)이 있다. 이 가운데 일곱 번째 바른 관찰(정념)과 여덟 번째 바른 집중(정정)은 밝은 지혜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앙굿따라니까야는 명지(明智)로 이끄는 방법으로 집중(止, samatha)과 통찰(觀, Vipassanā)을 제시하고, 집중과 통찰은 각각 탐욕과 무지를 제거하는 수행임을 말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명지로 이끄는 두 가지 원리가 있다. 두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집중과 통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집중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마음(心, citta)이 닦여진다. 마음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탐욕(貪, rāga)이 끊어져 버린다. 수행승들이여, 통찰이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지혜(慧, paññā)가 닦여진다. 지혜가 닦여지면 어떠한 목표가 성취되는가? 무지(無知, avijjā)가 끊어져 버린다. 수행승들이여, 탐욕에 물들면 마음은 해탈되지 못한다. 무지에 물들면, 지혜가 닦여지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사라지면, 마음에 의한 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 이루어지고 무지가 사라지면,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이 이루어진다.”
명상(수행)의 두 바퀴인 집중과 통찰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가 겸비해야 될 요건임을 알 수 있다. 집중은 마음에 여러 사념들이 멈추게 되고 부글부글 끓는 탐욕과 분노가 고요해져 마침내 제거시킨다. 이른바 사무량심이 충만된 상태가 된다. 통찰은 이렇게 잘 집중되고 맑혀진 마음으로 탐욕과 분노의 본성을 꿰뚫어 관찰하여 지혜를 얻는 수행이다. 이것은 해탈의 여섯 단계를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감관의 제어는 계행의 기초가 되고, 계행은 올바른 집중의 기초를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은 신체적 정신적 현상의 진정한 본성을 아는 기초를 제공하고, 신체적 정신적 현상의 본성을 알면 망상이 제거되고 집착에서 벗어나고, 망상이 제거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면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이 생겨난다.”
여기에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의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집중명상(수행)에 의해 모든 탐욕이 제거되고 통찰명상에 의해 지혜가 계발되어 망상과 무지로부터 벗어난다. 이것은 집중 명상이 수행자의 인격(戒)과 상호 관련이 있고 통찰명상이 수행자의 지혜(慧)와 상호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명상수행인 정학은 계학과 혜학에 긴밀하게 연관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명상수행의 두 범주를 두루 알고 숙달하여 계정혜 삼학을 두루 완성해야 될 책임이 있다. 본고에서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 통찰명상을 자세히 살펴 심리치료와의 연관성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은 통찰 명상의 목적과 통찰 명상의 요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뭇삶을 청정케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케 하고, 바른 길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단하나의 길이 있으니 곧 사념처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열심히 분명한 앎(sampajāna)과 주의깊음을 지니고(satimā) 세간에 대한 탐착과 혐오를 벗어나 열심히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며 지낸다.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며 지낸다.
통찰 명상 또는 통찰 수행의 목적은 ‘중생을 청정케 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케 하고, 괴로움과 근심을 소멸케 하며, 올바른 길에 이르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것’이며, 통찰 수행의 도구는 ‘분명한 앎과 주의깊음’이다. 열심히 노력하면서 분명한 앎과 주의깊음을 가지고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탐착하는 마음과 혐오하는 마음 없이 관찰한다. 이것이 통찰수행이다.
통찰 수행은 통찰의 순서를 몸으로부터 시작하여 법에 대한 관찰로 마무리하는데, 몸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나라는 망상과 나라는 뿌리 깊은 의식성향을 제거할 수 있다고 앙굿따라니까야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나는 있다는 망상이 끊어진다. 그 하나의 원리란 무엇인가? 신체에 대한 관찰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나는 있다는 망상이 끊어진다.”
상윳따니까야는 몸에 대한 관찰에 이어 연기적으로 사유할 것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몸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이전의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며,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느낌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그래서 고귀한 제자는 연기의 법칙을 듣고 철저하게 사유한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이 몸은 내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이전의 행위의 결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 붓다가 밝힌 연기의 진리는 역사성이 바탕이 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몸을 관찰하는 것은 몸 안에서 발생하는 느낌을 관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은 다섯 가지의 신체적 감각(眼. 耳. 鼻. 舌. 身)의 영역과 마음(意)이라는 여섯 번째 정신적 감각의 영역을 통해서 만난다. 접촉이 어떤 감각 영역에서 일어나면 곧 느낌(受)이 발생한다.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집착이 일어나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면 배척이 일어난다. 이런 과정은 온전히 깨어 주의 깊게 바라보는 통찰 수행으로 자각하기 전에는 무수히 반복되면서 조건화 된다. 이렇게 조건화 된 느낌들은 복잡한 인식의 과정을 거쳐서 망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여러 접촉을 통하여 느낌이 생성된 이후에 이 느낌에 대한 통찰이 바르게 나타나지 않으면 망상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의 생겨남으로 발전하여 결국에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나이다’ 등의 자아관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느낌은 인간에게 관념을 발생시키는 조건이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이 노력을 통해 인지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만약 수행자가 주의를 기울여 관찰한다면, 접촉이 일어난 후 발생하는 느낌을 포착할 수 있고, 느낌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탐착(집착) 또는 혐오(배척)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그 과정을 보고 알아차리는 순간 조건화된 무의식의 경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즉, 여섯 가지 감관(六根)을 지닌 몸에서 느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수행자는 느낌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깨달아 자동적인(조건화된) 무의식의 충동을 미리 막을 수가 있다.
이와 같이 느낌에 대한 자각은 사성제와 팔정도를 경험적으로 이해하는 조건이 된다. 이런 이유로 붓다는 특별히 느낌을 관찰하는 것을 강조한다. 느낌(受, vedanā)은 거룩한 진리의 하나인 고통(苦聖諦)을 탐구하는 이상적인 수단이다.
느낌(vedanā)은 갈애(taṇhā)를 발생시키는 조건이다. 따라서 고통의 원인인 갈애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느낌을 다스려야 한다. 디가니까야는 이 과정을 분명히 하고 있다.
“느낌(vedanā)을 조건으로 갈애(taṇha)가 생긴다고 불려진다. 아난다여, 어떤 방법을 통하여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는지 이해될 수 있는가. 가령 눈의 접촉으로 생겨나는 느낌, 귀, 코, 혀, 몸의 접촉... 마음의 접촉으로 생겨나는 어디에서든 느낌이 없다면, 느낌이 제거됨으로써 갈애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이것은 갈애(taṇhā)의 원인, 근원, 기원, 그리고 조건이다. 그것이 느낌(vedanā)이다.”
이러한 갈애로 말미암아 모든 집착이 생기는 바, 12연기의 촉-수-애-취(觸緣受 受緣愛 愛緣取)의 연기구조는 고통의 발생 기전이자 통찰수행의 핵심이 된다.
마음에 대한 통찰은 현재 마음이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무지가 있는 마음, 긴장된 마음과 흩어진 마음, 계발된 마음과 계발되지 않은 마음, 고귀한 마음과 고귀하지 않은 마음, 집중된 마음과 집중되지 않은 마음, 해탈된 마음과 해탈되지 않은 마음으로 분명히 아는 것이다.
법에 대한 통찰에서도 우선 다섯 가지 장애를 통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경우에도 안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안으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있다고 분명히 알고, 아직 없었던 욕망이 생겨나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이미 생겨난 욕망을 버리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이리하여 고통에 대해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고 완전히 이해하여 마침내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통찰 수행이다.
불교 명상수행은 계정혜 삼학 가운데 정학에 해당하면서 동시에 계학과 혜학을 아우르고 있으므로, 자각되지 않은 어두움의 고통으로부터 밝은 지혜로 이끄는 해방의 (치료적) 원리라고 할 수 있겠다.
3. 심리치료의 통찰
심리치료는 한 인간으로서 환자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현실에 초점을 맞춘다. 치료자는 환자가 보여주는 현실을 단 하나의 권위로 받아들여야 하며, 발전하고 있는 치료과정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치료자는 환자의 모든 연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주요 동기들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면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과 해석되어져야 할 것을 알아내어야 한다. 치료자는 사람 대신에 증상을 분석하는 일이 없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증상은 하나의 상징이다. 증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치료자와 환자는 함께 작업하는 것이다. 환자는 어린 시절 여러 요인들에 의해서 자유로운 성장을 방해 받아, 어린이로 남아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끼고 성장을 포기하거나, 원래의 대상(original objects)에 대한 증오심이 억압되어 대상으로부터 독립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요인들이 무의식에 갇혀있고 자각되지 않는 한 다양한 증상이나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빚게 된다. 이 때에 훈련된 치료자로부터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요인들을 자각하고 통찰하여 갈등을 극복하게 된다.
무의식적 갈등을 의식세계로 끌어내어 풀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과 저항에 부딪히고 애증이 교차한다. 환자의 성장과정에서 입은 정서적 상처와 왜곡된 행동반응들을 환자 스스로 깨닫고 수정해가는 데는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공감적이고 우호적인 분위기는 긴 치료의 여정을 견딜 수 있는 추진력이 된다 하겠다. 수용적인 태도는 환자가 어려운 시기를 견디는데 도움을 준다. 특히 왜곡된 유아적 양식이 동원될 때 환자가 어린이임을 허용하는 태도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환자의 성숙한 자아 밑에서 작용하는 왜곡된 유아적 양식을 부모나 가족과 달리 융통성 있고 부드럽게 다룸으로써 환자의 가혹한 자기 처벌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렇지만 환자가 어린아이의 위치에 있음으로써 환자는 모든 것을 받고 치료자는 모든 것을 주는 관계라면, 환자는 치료를 통해서 발전될 수 없다. 적절한 욕구의 좌절과 직면을 통해 성숙한 성인관계를 맺어나가면서 왜곡된 유아적 양식을 탈피하게 된다. 냉철한 객관성은 감정적인 힘을 안전하게 기술적으로 다루는데 있어서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냉철한 치료자의 태도는 환자에게 때로는 고통을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치료자가 마음을 열고 경청하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고 배려함이며 충분히 수용함이다. 이런 태도가 정신치료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환자와 치료자 사이의 신뢰를 쌓게 한다. 기본적인 신뢰를 쌓지 못하면 깊은 속내를 내놓기가 어렵다. 그러나 치료자가 우호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로 환자를 대하는 것만으로는 환자가 안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를 어느 정도 위로받지만 자신의 문제가 어디서 기인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치유에 이르지는 못한다. 분석적 치료의 가장 큰 무기는 해석, 곧 통찰과 이해이다. 치료자에게 나타내는 환자의 감정은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를 포착하고 이해하는 것은 치료자의 전문적 영역으로 다년간 훈련받고 경험해야 얻어질 수 있다. 환자가 자신이 정당하게 이해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치료자의 따뜻하고 친절함에서 얻는 것보다 많은 위안과 확신과 만족감을 준다. 만약 문제 이면에 있는 주요 동기와 감정이 초기 면담에서 발견된다면 정신치료를 하겠다는 동기는 굳어질 것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유쾌한 진실을 직면하는 일은 적절히 이해받는다는 느낌에 의해서 보상받게 될 것이다.
심리치료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환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치료를 돕는 긍정적 힘이고 하나는 치료를 결렬시키는 부정적 힘이다. 전자에는 치료동맹과 긍정적 전이 등이 해당되고, 후자에는 저항과 부정적 전이 등이 해당된다. 치료자 내면에서도 긍정적 역전이와 부정적 역전이가 일어나게 된다. 이때 치료자는 분석 중에 어김없이 일어나는 이런 변화들을 주의 깊게 점검해야 한다. 치료자가 자기 자신의 투사를 시인하는 것은 실상을 파악하려는 치료자의 기본조건이기도 하다. 환자는 치료자가 모든 것을 아는 전지전능한 신같은 존재이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 어린시절에 부모에게 했던 것과 같이 치료자를 대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치료자에게 의존하고 복종하고 두려워하거나 존경한다. 그러므로 만약 치료자가 그 자신 속에 지속되고 있는 유아적인 면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라면 치료자는 이것을 아주 즐기게 되거나, 모든 질문에 답변을 해주려 하고 해석해주려 할 것이다.
치료자의 임무는 요약하면 전이의 해석을 통하여 환자가 통찰력을 갖게 함으로써 조건화를 해제하고 재조건화를 일으켜 교정적인 정서경험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환자를 도우려는 따뜻한 관심과 연민, 성실함, 민감성, 사려깊음, 그리고 존중이 해석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해석은 치료자의 추론하기, 환자에게 말하기, 환자의 훈습으로 구성된다. 환자가 내놓은 자료를 통해 추론하고 환자의 언어로 그 의미를 말해주는 것이 해석이다. 해석을 독단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환자로부터 해석을 끌어냄으로써 전달하는 방식이 훨씬 더 신뢰롭고 효율적이다.
통찰은 지적인 이해로부터 충분한 감정적 자각까지 깊이가 다양하다. 피상적이고 지식수준의 통찰(intellectual insight)은 단지 희미하게 알고 있었던 생각을 지식수준에서,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예컨대 심리학 박사가 “나는 정신분석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내 문제가 유년기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소위 통찰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대인관계가 어렵고 우울하다.”면서 정신분석이 자기에게는 쓸모없는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지적 통찰을 가진 것이다. 머리로 아는 지식(head knowledge)만으로 인격이 변하기 힘들다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체험적 자각인 마음의 깨달음(heart knowledge)이 환자를 변화시킨다. 정서적 통찰은 증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대인관계의 성숙함과 나아가 인격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4. 명상수행과 심리치료의 비교 고찰
명상 수행은 현재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 있게 한다. 치료 또한 현재에 초점을 맞춘다. 마음의 집중, 마음의 평정이 깨달음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치료자는 환자에게 온전히 집중하되 열려 있어야 하며 환자의 긍정적 부정적 반응에 대응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태도로 환자의 내면의 동기를 이해하는데 주력한다. 이러한 치료자의 흔들림 없이 환자의 내면을 관찰하는 태도는 통찰 수행에서 탐착과 혐오를 떠나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자의 태도와 다름 아니다. 집중명상은 마음의 탐심이나 진심은 제어할 수 있지만 근원적 깨달음은 염처 수행 등을 통해 일어나는 것처럼, 정신치료에서도 치료자의 우호적이고 평등한 태도만으로는 치료가 완성되지 않고 갈등의 근원을 직면하여 명료화하고 해석을 통하여 갈등의 의미를 통찰함으로써 치료적 변화가 이루어진다. 앞에서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흐름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어야 한다는 부분은 바로 통찰수행의 수념처(受念處)와 심념처(心念處) 수행과 다르지 않다. 심리치료의 통찰은 공감적 조율에 바탕을 둔 갈등의 무의식적 파생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자신의 행동 패턴에 대한 특성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통찰수행으로 고의 발생과, 그 원인과 고의 소멸과 그 소멸시키는 방법까지 분명한 앎과 봄을 실현시키는 것은 심리치료의 깊은 분석과 이해, 그리고 통찰과 같다.
있는 그대로의 신체적 정신적 과정들을 바로 보는 통찰수행은 삶 속의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반응 사이에 공간을 제공한다. 통찰 명상은 어떠한 고통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고, 사건에 반응하는 일련의 정신과정을 볼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통찰력은 점점 발전하여 의도적으로 지켜보려는 노력 없이도 현재에 몰입할 수 있다. 이러한 몰입은 의식적으로 관찰자를 동원하려는 에너지를 절약케 해주고, 꿈이나 백일몽으로 도피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를 저축할 수 있게 된다. 끊임없는 비평과 재잘거림이 점점 사라지고 정신은 건강 상태로 진입하게 된다. ‘지금 여기’ 온전히 몰입할 수 있을 때에 ‘나’라거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은 설 틈이 없게 된다. 이리하여 모든 사물과 경험에 대한 직관을 통하여 사물의 세 가지 본성에 대한 통찰을 이루게 된다. 뚜렷한 에고에 의해 자타가 분리되는 이원론으로부터 해방되는 명상의 깨달음은 심리치료에서 얻는 통찰과 확연히 다른 점이다.
자기에 대한 이해와 자각, 그리고 통찰은 곧 불교 명상이 추구하는 깨달음의 구체적 표현이자 심리치료의 원리이다.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치료자의 무지에 의해 무의식적 욕망의 충족에 불과할 수 있는 여러 행위를 환자에게 표출하면 결국 치료는 성공할 수 없고 자칫 치료자에게 종속되고 의존되는 환자(또는 신자)를 만들 위험이 있다. 심리치료는 깊은 이해와 자각이다. 자신의 내적 자원과 책임감이 중요하다. 불교의 구경각(究竟覺)이나 본각(本覺)의 수준에서는 언어를 들이댈 수 없으나, 시각(始覺)의 수행 중간 과정에서는 무수한 깨달음이 존재한다. 그것은 해오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으며 이것은 심리치료에서 얻는 통찰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법념처(法念處) 수행에서 사성제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바로 봄은 무의식적으로 조건화된 뿌리 깊은 경향성을 알아차리고 깊이 이해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의 과정 그 자체이다.
5. 명상의 임상 적용 사례
이와 같은 명상과 심리치료의 만남을 위해 한별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한별심리분석연구소에서 심리치료 받는 환자에게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을 적용하였다. 그 가운데 긍정적 결과를 보인 사례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사례 1)
26세 여대 휴학생으로 주요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이다. 그녀는 3년 전부터 3군데 정신과에서 항울제 약물치료 등을 받았으나 실패하고 본원에 의뢰된 경우이다. 치료 경과; 자살만 생각하고 아무 의욕을 보이지 않던 환자는 새로운 항울제 사용하면서 입원 4병일째 명상프로그램 참석하고 좋은 경험을 한 이후 병실에서도 수시로 명상을 혼자 연습하면서 빠른 속도로 기분이 나아지고 의욕을 회복하여 한 달 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이는 새로운 항울제의 효과가 발현되기 이전의 증세 호전으로 명상이 만성 우울을 극적으로 역전시킨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퇴원후 학교에 복학하고 잘 적응하면서 다니는 걸 확인 후 언제든지 방문하기로 하고 집 근처 병원에서 유지치료 받기로 하였다.
사례 2)
30세 남자로 명문대 4년 1학기 제적 후 매사에 의욕을 보이지 않고 할일 없이 방황하였다. 이러한 생활이 5년째 접어들자 더 이상 이를 보아주지 못한 부모가 간섭하고 잔소리하기 시작하였고 환자는 이에 대항하여 10-20일 씩 찜질방과 PC방 전전하면서 가출하였다. 환자를 컴퓨터 중독이라고 생각한 부모에 의해 본원을 방문하였다가 Th의 입원 권유로 본인 스스로 입원하였다. 그는 4년 전 대4 초반 공부에 대한 의욕 상실하고 학교를 결석하다 휴학하기를 3번하고 3번에 걸쳐 복학했으나 학업 적응에 실패하였다. 결국 전공이 맞지 않다고 합리화하고 학교를 포기한 그는 이젠 공무원 시험이나 일반 중소기업체 취직이나 할까 한다 하였다.
치료 경과;
역시 이 환자도 입원 초부터 명상프로그램 참가하여 좋은 경험을 체험하였고, 1개월 명상프로그램 참석 후 훨씬 자신의 감정을 잘 떠올려 볼 수 있게 되었다. 대4 올라가기 직전 겨울방학 중에 사귀던 여자 친구로부터 헤어지자 통보 받고 나서 당시는 자신도 같이 헤어진 것으로 믿어 그녀에 대한 미련이나 아픔 등 못 느끼고 단지 4학년 전공 공부가 감당할 수 없고 어려워졌다 생각하였으나 결국 그녀에 대한 상실감이 컸음을 통찰하게 되었다. 명상을 열심히 참석하고 병실에서도 틈틈이 한 후, 마음이 평화롭고 부모와 사사건건 부딪치고 부모님의 지적을 구속으로 느꼈던 일들이 사소하게 느껴진다고 보고하였다. 항울제 점점 줄여 1개월 반 만에 퇴원하였고 퇴원 2개월 후 항울제 복용 중단하고 명상은 매일 30-40분 유지하고 있다. 명상치료 시작 5개 월, 자퇴한지 4년 만에 복학하여 잘 다니고 있다.
사례 3)
32세 남자로 대학 3학년 다닐 때 발병하였다. 이후 6년간 6회 입원을 반복하였다. 그의 병은 매번 약물 치료 중단 후 2-3개월 내에 피해망상과 환청 등이 심해지고 부모에게 폭력적으로 대하여 재입원한 망상형 정신분열병이다.
치료 경과;
급성 증상이 어느 정도 소실된 후부터 명상 프로그램을 참가하였으나 처음 참석하였을 때 다리도 아프고 지루해서 회의를 느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참석하였을 때 정신이 하나로 집중되는 느낌을 경험하고 이 경험이 좋아 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고 보고하였다. 스스로 하루 한두 시간씩 명상을 하면서 처음엔 오히려 망상 등 생각들이 더욱 떠올랐으나 치료자의 지시에 따라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오직 호흡에만 집중하였다. 마음이 넓어지고 차분해지고. 마음이 깨끗해진 것 같다고 보고하였고, 그 동안 엉뚱한 생각과 싸우고 없애려고 애를 썼는데 그냥 충분히 표현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생각에 머물지 않고 호흡에 집중하면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용기를 주게 된다 하였으며, 사람들 볼 때 정성을 다하게 된다고 보고 하였다. 입원한지 6개월 만에 통원치료로 전환하였다. 점점 좋은 느낌이 드는데 계단식으로 좋아지는 걸 체험했다 하였으며, 이것은 너무 놀라운 경험이라 보고하였다. 요즘은 대인관계도 원만해져서 직장도 바꾸지 않게 되었고 부모님과도 관계 개선되었다고 보고하였다. 매일 2시간 정도 명상을 한다고 보고하였으며 병을 받아들이기로 한 후 약 복용도 어김없이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퇴원 후 1년 경과)
다음은 외래 환자 가운데 정신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에게 통찰명상을 적용한 사례이다.
사례 4)
42세 남자 회사원은 건강에 대한 과도한 염려와 강박적 불안이 주 문제였다. 대학 시절 아버지의 간질 발작을 목격한 후 건강에 대한 강박적 불안과 열등감, 우울감 등으로 치료자를 찾았으나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불규칙적인 방문을 하였다. 치료초기에 타 정신과에서 받은 약물치료에 불신을 보여 힘들 때마다 치료자를 찾아 왔는데 장염에 갈리면 대장암이 아닌지, 위염이 생기면 위암은 아닌지 확인될 때까지 불안 초조해 하였다.
치료 경과;
그는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강박적불안만 호소하였다. 치료자를 지나치게 의존하고 존경하였는데 아마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였을 것으로 보였다. 유학시절 성접촉을 하면 어김없이 에이즈 공포를 호소하며 불안에 휩싸여 여러 번 검사하여 음성임을 확인한 후에야 불안이 감소하는 경우가 반복되었다. 귀국 후 입사하여 여성과 관계에서 조루증과 발기부전을 호소하였고, 그때마다 치료자를 찾아 2-3 회 상담을 받고 불안이 해소되면 수개월에서 길게는 1-2년 소식이 없었다.
정기적 정신치료(1~50회);
그 사이 결혼하고 회사에서 인정받아 중책을 맡기까지 성공하였으나 이유 없는 짜증과 에이즈나 암에 대한 공포는 늘 그를 괴롭히는 문제였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고 2년 전부터 주 1회 정기적인 심리치료를 받기로 하면서 이 두려움은 반항심과 적개심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치료 중반에는 자신을 지나치게 다룬 어머니에 대한 반항심과 적개심이 불쌍한 우리 어머니라는 의식에 의해 자각될 수 없도록 억압되어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50~100회)
걷잡을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표출되면서 환자는 안정을 잃고 죄책감에 사로잡히다 스트레스 해소 목적으로 찾는 퇴폐업소의 접촉으로 다시 에이즈 공포를 경험하기를 반복하여 통찰명상을 권유하였다. 치료 후반에는 본가의 이복형제들과 큰어머니에게 비밀로 하면서 어머니와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평범하긴 하나 우호적이었음)
명상치료 최근 1년간 경과;
명상 중에 관찰하는 힘이 커지면서 강박적 불안을 지켜보는 시간을 확보하였고 검사로 확인하지 않게 되었다. 불안한 생각이 생겨나서 머무르다가 왜곡된 것임을 알아차리자 불안한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되다. 분노가 참을 수 없는 죄의식을 일으킨 결과 두려움으로 표현되었음을 통찰하였다. 결국 그의 강박적인 건강염려증이나 발기 부전 등은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징벌의 의미임도 통찰하게 되었다. 마음의 안정과 함께, 부인과 성생활도 자연스럽게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가슴이 덜컹하면서 최악의 상황까지 염려하고 조바심 낼 상황에서 ‘지켜보자’는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1-2일 또는 2-3일 안에 불안이 감소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가끔 치솟는 분노의 감정은 관찰하기 전 폭발하기도 하였으나 전과 달리 바로 자각하고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인위적으로 없애려 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태도가 점점 익숙해짐. 꿈도 초기와 중기에는 주로 쫓기고 싸우는 내용으로 전쟁, 살해 위협 등 공격성과 관련되었는데 최근에는 항상 관찰하고 지켜보는 꿈들이 많이 나타났다. 불안이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메마른 정서에 윤기가 돌게 된다고 꿈(사막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는 꿈)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최근 방문시 환자는 “큰 체험을 했어요.” “지금껏 막연히 알았던 것을 직접 체험하여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불안이 오면 전에는 불안에 푹 빠져 버렸는데 ‘불안함’’불안함’하고 명명(naming)하자 공간이 생기는 체험을 하였다. 그 동안 불안을 없애기 위해 다른 생각으로 대치하여 불안을 없애고 또 다른 불안이 오면 다른 생각으로 대치하여 없애려는 과정을 밟아 왔는데 이것이 오히려 불안에 얽매이게 하였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총괄;
의식에서 그 동안 철저하게 억압되었지만, 그를 괴롭혀 왔던 부모에 대한 감정양식은 치료자에게 전이되었고, 여러 꿈들에서 그를 괴롭혀온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아동기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부모의 억압적 태도와는 달리, 그를 성인으로 존중하는 치료자의 태도에 의해 재조건화 되는 훈습(working through) 과정을 밟으면서 / 통찰명상으로 자신의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태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음.
6. 맺는 말
심리치료나 명상수행은 이론이나 설법이 아니다. 깊은 이해와 자각이다. 믿음으로 시작할 수는 있으나 완성할 수 없다. 오직 통찰과 깨달음으로 완성할 수 있다. 심리학적 지식도 완벽한 불교적 이론도 정신적 고뇌 앞에서는 무력하다. 심리치료와 명상수행이 필요한 이유이다. 자비와 지혜, 지혜와 자비는 불교 수행자뿐만 아니라 심리치료에 임하는 치료자나 환자가 모두 갖추어야 될 덕목이다. 불교의 통찰명상은 욕망의 속박과 존재의 결박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정신치료를 뛰어 넘고 있으나, 자신이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무의식적) 부분을 통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는 정신치료가 보다 체계적이고 심층적인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공동 목표를 지향하는 명상과 심리치료는 서로 보완해야 될 부분이 많은 것 같고, 앞으로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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