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흙집 짓기/황토집 자료

[스크랩] 회암사의 서승당 - ㅌ자 온돌의 과학

ksanss@hanmail.net 2011. 3. 25. 09:53

회암사의 서승당 - ㅌ자 온돌의 과학  

 
회암사(부활하는 조선 최대의 국찰) / 박상일.경기문화재단

라마교
테베트를 중심으로 하여 발전한 불교. 7세기 주술을 중시하는 티베트의 고유 신앙인 본교와 중국계.인도계가 흡합되어 토착화된 불교. 8세기 중엽부터 밀교가 라마교의 중심이 되었다. 13세기에는 원(元)나라에 전파되어 국교로 섬겨졌다.



온돌- 불을 다루는 선조들의 과학

한국 고유의 난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생활습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모든 민가에 사용된다. 온돌의 원리는 열의 전도를 이용한 것인데, 방바닥 밑에 깔린 넓적한 돌(구들장)에 불기운을 끌어들여, 온도가 높아진 돌이 방출하는 열로 난방하는 것이다. 온돌의 역사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고대기록에서 온돌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 것은 <구당서>가 가장 오래된 것인데, 여기에 기록된 고려(=고구려)항에 보면 "겨울철에는 모두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고 하였으며, <신당서>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외에 신라와 백제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는 그 풍속이 고구려와 같다고 하며, 신라에 관해서는 "겨울에는 부엌을 집안에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놓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것으로 백제에도 온돌이 있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신라도 그 기록이 귀족계급의 생활을 말한 것으로 보아 서민층에 온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온돌의 구조는 크게 불을 지피는 아궁이, 불기운이 전달되는 공간인 고래, 불기운을 방안에 들이는 구들, 그리고 나머지 연기와 재를 환기시키는 굴뚝으로 나뉜다. 온돌은 방고래를 만들고 그 위에 구들장을 놓기 위한 흙 또는 돌로 쌓아올린 두덩을 만든다. 그 위에 두께 5~8cm의 판판한 화강암을 돌로 받쳐가며 일정한 높이로 놓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르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그때까지 만든 부분을 건조시킨다. 그 후 새벽을 바른 다음 초배를 하고 다시 건조시킨 후 장판지를 바른 것이다. 아궁이에서 굴뚝에 이르는 방고래 형식은 1로식.2로식.다주식 등이 있으며 연기가 방고래 전체에 골고루 지니가도록 하고, 바닥은 아궁이에서 굴똑으로 갈수록 약간 높게 만든다. 따라서 구들장 위에 바르는 진흙의 두께는 아궁이쪽이 두텁고 굴뚝 쪽은 얇게 되어 방바닥 전체가 골고루 따뜻하게 된다. 그러나 방고래의 길이가 너무 길면 불이 잘 들지 않고 연소하기 힘들다.

오늘날은 개량식 온돌로서 보일러를 설치하고 방바닥에 파이프를 매설하여 난방하거나, 연탄보일러로 온수를 순환시켜 난방하는 방식이 많이 보급되어 있다. 온돌은 열효율면에서도 뛰어나지만 구들에서 나오는 바이오에너지로 인한 약리효과 기능도 있다. 예부터 산모는 복중에도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구들에 몸을 지지며 산후조리를 했고, 고된 노동에 지친 몸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고나면 몸이 풀어져 다시 일상의 노동으로 돌아가곤 했다.


회암사의 서승당 - ㅌ자 온돌의 과학

6단지 서쪽 끝 서승당은 온돌시설을 갖추고 남북으로 길게 놓여진 장방형의 건물이다. 이 건물이 흥미로운 이유는 놓여진 온돌시설의 모양이 아주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서승당의 온돌시설은 지면보다 높게 돌출된 구조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의 온돌인데 하늘에서 보면 ㅌ자를 남북으로 마주보게 놓은 모양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이런 유사한 구조의 온돌은 유일하게 지리산 칠불암의 '亞'자 방에서 발견된 바 있다. 칠불암의 아자방은 '그 구조가 오묘하여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49일 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선방인데, 서승당 역시 한꺼번에 수십명의 인원이 누울 수 있는 구조로 승려들의 선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서승당의 온돌시설은 칠불암과는 그 규모나 보존상태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양호해서 고건축학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출입구는 동쪽편에 있고 북쪽과 남쪽에는 아궁이 시설이 있는데 북쪽 아궁이 시설에는 부엌시설이 함께 발견되었다.

칠불암 아자방 - 목마를 탄 동승(童僧)
칠불암 아자방 이야기 
열하일기의 구들놓는 법에 관한 글
규합총서의 전통생활기술집


 




[타임머신 '민속 기행'] 화로
온돌방의 난방 보완·음실 데울 때 쓰던 도구
온 가족 옹기종기 모여 앉던 정겨움 그리워

놋으로 만든 전통 화로. 우리 조상들은 겨울이 찾아오면 세숫대야 모양의 화로 안쪽에 숯을 넣어 방 안을 데우거나 고구마ㆍ밤 등을 구워 먹곤 했다.  추위가 다가오면서 사람들은 밖에서의 생활보다는 따뜻한 실내 생활을 더욱 좋아하게 됩니다. 따뜻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기본 난방 이외에도 여러 가지 난방 도구를 사용해야 합니다.

자연의 섭리를 기초로 하여 일상 생활을 꾸려 온 우리 조상들은 온돌을 비롯하여 다양한 난방 문화를 일궈 냈습니다. 온돌은 밑으로 고래를 켜서 방을 덥게 만드는 방바닥을 온돌, 이 온돌을 놓은 방을 온돌방이라 하지요. 온돌방의 경우, 방바닥은 따뜻하나 공기가 차갑고, 또 아랫목은 따뜻하지만 윗목은 차가울 수 있습니다. 이런 온돌방의 난방을 보완해 주는 도구로 ‘화로’가 있습니다. 이 밖에 불씨를 보존하고, 음식을 데울 때도 활용하는 등 일상 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된 조상들의 필수적인 난방 도구가 화로였지요.



화로란 숯불을 담아 놓는 그릇으로 난방과 취사를 보조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오지ㆍ무쇠ㆍ놋쇠ㆍ곱돌ㆍ백동ㆍ돌ㆍ흙 등 여러 재료를 써서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데, 여기에 불씨가 담겨질 때 비로소 화로의 기능을 할 수 있지요. 예전에는 화로가 어느 집에나 있었고, 특히 추운 겨울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드는 곳에 화로가 놓이게 마련이었습니다.

화롯가에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부젓가락으로 불씨를 살려 가며 밤을 구워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는가 하면, 삼발이를 놓아 찌개를 데우거나 약탕기를 올려놓기도 하였지요. 또 담뱃불을 붙이거나 바느질할 때 인두를 달구는 데에도 화롯불을 썼습니다. 또 주인이 손님을 맞을 때 화로를 손님 곁으로 밀어 주어서 따뜻한 정을 표하였고, 여러 사람이 화로를 가운데 두고 있을 적에는 나이가 많은 사람쪽으로 보내는 게 예의였지요.

예전에는 불씨가 집안의 재산을 좌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불씨 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 주었으며, 종가에서 분가할 때에는 맏아들이 이사하는 새 집에 불씨 화로를 들고 먼저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실제로 전남 영광 영월 신씨 종가의 경우, 화로를 이용하여 500여 년 동안 불씨를 이어 왔으며, 조선 시대 홍만선이 지은 ‘산림경제’라는 책에 쇠똥과 호도 등을 이용하여 불씨를 보관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속담에서도 화로를 이용해 불씨를 소중히 보관해 온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화로 불씨를 꺼뜨리지 않아야 잘 산다.’거나, ‘화롯불이 끊어지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이야기는 불씨를 꺼뜨리는 소홀한 살림살이로는 집안을 꾸려 나갈 수 없음을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조상들의 성실성에서 배어 나온 교훈이지요.

그런가 하면 속담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화롯불은 활활 타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화력으로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랐던 것도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화로에 활활 타는 불꽃을 담으면 근심이 생긴다.’ㆍ‘빨리 따뜻해지는 화로가 빨리 식는다.“는 등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지요. 이는 화로의 특성을 잘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차분한 성격이 바람직함을 일깨워 주는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화로는 불씨를 보존하는 도구로써, 그리고 난방과 음식을 데우는 보조 도구로써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해 왔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 철학도 듬뿍 배어 있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는 이 때에 아련한 기억에 남아 있는 화롯불의 은근한 따뜻함이 더욱더 간절히 생각납니다.

이관호(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

 

 

 

출처 : 사람 숲에 있어도 사람이 그립다
글쓴이 : 曉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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