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의 귀환을 막는 오르가즘의 기능
빌헬름 라이히, "오르가즘의 기능" 윤수종 역, 그린비, 2005.
꽤 난해하고 진지한 인문학 서적인데 전철에서 읽기에는 민망한 책이 있다. 조르주 바따이유의 "에로티즘"이 그랬다. 게다가 그 명도 높은 빨간 색 표지라니, 제목과 함께 주위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번에 나온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이 아마 이 ‘억울한’ 시선을 독차지할 것 같다.
선홍색 표지에 이번엔 ‘오르가즘’이다. 학창 시절의 불투명 책가위가 생각난다. 그래도 ‘책’은 괜찮다. ‘기대하는 그림’도 없고. 얼마 전 전철 안에서 다정한 입맞춤을 나누던 젊은 커플이 술 취한 ‘도덕가’에게 봉변을 당하는 걸 ‘또’ 보았다. 자기가 무슨 우국지사라도 되는 양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느니’, ‘요즘 것들은 도대체 공중도덕을 모른다느니’ 고함을 질러댄다.
MBC 음악캠프 생방송 중 성기를 노출한 ‘카우치’ 멤버 두 명이 구속됐다. 내친 김에 공연 예술에 대한 성적 규제가 강화될 전망이다. 당국은 그렇다 치고 좀 전까지 ‘음란’ 사이트를 서핑하던 네티즌들의 손가락은 ‘이런 미친 놈들은 다 죽여 버려야 한다’는 조의 리플을 쳐댄다.
그들이 분개하는 것은 성도덕이 붕괴되어서가 아니다. 실제 ‘거시기’의 결여를 중심으로 형성된 성적 판타지의 붕괴가 그들의 공분을 산 것이다. 시선의 역학 관계에서 판타지 스크린의 ‘대상’이어야할 놈들이 돌연 관객을 ‘보임’의 수동적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노출은 여자 연예인의 가슴 노출보다는 ‘바바리맨’의 노출에 가깝다.
이 해프닝으로 ‘무거운 도덕과 위험한 성’이라는 니힐리즘적 이항대립이 강화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성 억압적 도덕도 나쁘지만 무방비로 해방된 성은 더 나쁘다는 강요된 선택의 논리 속에서 전철의 연인들은 설 자리가 없다.
라이히라면 카우치 사건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라이히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해방되어야 할 성과 억압된 성을 혼동하는 것이다. 라이히는 문명의 도덕적 위선을 벗고 일체의 억압된 성을 해방시키자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라이히에게 해방되어야 할 성은 성 에너지이지, 억압과 원한에 붙들린 도착적 성욕이 아니다. 오히려 도착적 성욕과 도덕적 억압은 마치 김일성과 박정희, 후세인과 부시처럼 적대적 공모관계를 형성한다. 상대편의 존재 속에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는 이 변증법적 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라이히가 말한 성 해방이다.
"오르가즘의 기능"의 주된 내용은 성과 문명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 갇힌 프로이트를 넘어서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1930)에 따르면 자연과 문명, 충동과 도덕은 근본적으로 적대적이며, 이런 적대성은 충동의 부정(억압)이 문명의 긍정(승화)에 매개됨으로써 변증법적으로 해소된다.
라이히는 이런 변증법적 관계의 선험성을 거부하고 그 관계의 사회 역사조건을 따져 묻는다. 성과 문명의 적대적 공모관계는 가부장적 가족과 계급의 발생과 동일한 기원을 가지며, 따라서 계급 적대와 가부장적 가족의 소멸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당시 프로이트는 성 충동과 문명 간의 외재적 대립을 지양하는 매개 개념으로 ‘죽음 충동’을 제기했다. 죽음 충동은 긴장도 제로를 향한 쾌락원칙의 궁극적 도달점인 동시에 생명의 충동(에로스)과 대립하는 파괴적(타나토스) 성향의 발원지로 상정된다.
성 충동을 좌절시키는 것은 이제 충동 외부의 문명이 아니라 충동 내부의 죽음 충동이 된다. 그러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왜 인간은 삶의 행복과 성적 쾌락을 포기하고 문명의 억압을 받아들이는가? 왜 환자는 무의식적 기억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리고 나서도 자신의 고통스런 증상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가? 이 모든 것이 죽음충동으로 설명됨으로써 억압적인 문명과 무능한 분석가는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
라이히는 ‘죽음 충동’을 거부했다. 죽음충동은 쾌락원칙의 좌절로 인한 쾌락불안의 증상적 현상일 뿐 그 자체 독자적인 충동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죽음충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쾌락원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자기 파괴적 욕망의 사회적 현실 때문이다. 도착과 파괴와 독재의 승리 앞에서 그는 절망적으로 “창조의 계획안에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라이히는 프로이트가 절망한 그 지점에서 희망을 찾는다. 집단적 죽음충동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파시즘 속에서 그는 대중의 혁명적 욕망을 발견한다. 파시즘이 기존의 권위주의적 권력과 다른 점은 “대중의 자유를 향한 깊은 갈망을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파시스트는 금욕주의적 종교와 가부장적 가족, 부르주아적 계급 질서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는 대중들에게 해답을 주었다. ‘유대인의 음모’, ‘피와 흙의 공동체’, ‘국가의 사명’ 같은 해답의 ‘기표’들은 비록 모순투성이의 기의를 지니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해답이 주어졌다는 사실이지 그 내용이 아니다.
해명되지 못한 욕망에 ‘이름’이 부여되자 대중은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든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발산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그것이 욕망의 억압과 죽음을 지시할지라도. 문제는 이것에 ‘죽음 충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실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쾌락을 두려워하고 억압을 욕망하게 되는 대중의 구조적 원인을 찾는 것이다.
라이히는 파시즘적 욕망의 생산공장을 오이디푸스적 가족에서 찾는다. 유아기의 거세불안과 사춘기의 금욕, 강제적 결혼 속에서 성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방출은 차단되고 그렇게 좌절된 성 에너지는 주인-노예의 변증법이 지배하는 무의식적 표상 경제 속에서 탈출구를 찾는다.
성부-성모-신자의 삼각 구조 속에서 종교적 희열에 빠지거나, 아버지-총통, 어머니-조국, 아들-국민의 구조 속에서 파시즘적 향락에 매혹되는 것이다. 성적 만족에 대한 죄의식과 신비주의적 향락에 대한 매혹은 매저키즘으로 구조화될 때 가장 전형적인 파시즘적 신민(subject)을 낳는다.
무의식적 자기 처벌 욕망은 고통을 숭고화시킨다. ‘나의 수난과 희생은 내 속에 있는 숭고한 대상의 존재를 증명한다.’ 성적 만족의 금지로 인해 약화된 자아는 민족과 국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 속에서 나르시즘적 만족을 찾는 것이다.
이런 파시즘적 가족 질서 속에서 여성은 ‘순수한’ 인종과 ‘위대한’ 국민을 낳는 출산 기계로 전락한다. 20세기 초반 독일은 성 개혁운동과 여권운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세계 최저 출산율을 빌미로 민족주의자들은 여성의 성적 자결권을 ‘민족적 재앙’의 제단에 바쳤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들 중 일부도 ‘대중을 많이 낳아야 역사가 진보한다’며 출산장려 운동에 동참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다시 억압되었고 대신 ‘숭고한 모성’이니 ‘신비한 성모’ 같은 상징적 표상이 주어졌다. 최근 한국 사회도 출산율 저하를 국가적 위기로 표상하는 데 광분하고 있다. 대한보건복지협회의 123운동(결혼한 지 1년 안에 2명의 자녀를 30세 이전에 낳자), LG경제 연구원의 출산율 증진을 위한 독신세 제안, 간호조무사의 신생아 ‘학대’에 대한 국민적 공분 등 ‘출산율 저하=민족의 위기’라는 (이주 노동자와 혼혈 가족을 배제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가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계급 적대와 사회적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인터넷 공론장을 빠르게 전염시키고 있는 ‘공공의 적’ 신드롬, 직접 민주주의에의 포퓰리즘적 갈망, 민족주의로 무장한 신우파의 대두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청소년의 성은 여전히 금기의 음지에 처박혀 있고, 386세대의 사랑-정치-순수주의는 강우석의 포퓰리즘적 민족주의 영화나 비장미가 줄줄 흐르는 ‘연가(戀歌)’풍 대중가요와 멜로드라마를 통해 주류화 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성적, 정치적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들끓고 있지만 생명의 쾌락과 그에 따르는 자율능력이 확장되는 흐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자유에의 갈망만큼 ‘국민의 적’에 대한 증오와 대중의 원한을 풀어줄 강력한 통치자를 부르는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존재한 자유로운 책임에 대한 불안은 그 사람이 파시스트인가 민주주의자인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파시스트적인 심성을 만들어 낸다”는 라이히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라이히에 따르면 자유는 ‘욕망’이 아니라 ‘능력’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타자의 권위를 요청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율 능력, 민족이나 국가와의 동일시에서 오는 환상적 자존심이 아니라 자신의 일과 지식, 사랑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자기만족이 라이히가 추구하는 자유이다.
그런 자유인의 성은 강제적 결혼제도나 도덕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병리적인 애착이나 애착 방어에서 비롯된 난교에 빠지지도 않는다. 자유인의 오르가즘은 판타지에 사로잡힌 가짜 오르가즘이 아니라 상호 주체성에 입각한 지속적인 배려와 신체적 쾌락의 긍정에서 얻어지는 오르가즘이다.
자유인의 신체는 근육 갑옷 속에 도착적인 성욕을 감추고 있는 경직된 신체가 아니라 생명의 에너지가 부드럽고 매끈한 표면을 역동적으로 흐르는 유연한 신체이다.
라이히의 오르곤 에너지는 개별 신체의 경계를 넘어 사회 집합적 신체, 심지어 우주적 신체로 확장된다. 신비스럽게 들리겠지만 그의 오르곤 연구에 함축된 반-휴머니즘적 성격은 ‘인간’의 욕망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탈주의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작은 사람들아 들어라"에서 라이히는 플라톤적 대화술을 통해 반-유대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의 어리석음을 폭로한 후 마찬가지로 셈족의 정체성에 얽매여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하찮은 유대인이여, 어째서 당신은 오직 셈족에게만 돌아가고 원형질로 돌아가지 않는가? 나에게는 삶이 랍비의 사무실에서가 아니라 혈장 수축에서 시작된다.”
프로이트-라캉주의와 칸트-헤겔 철학의 결합을 통해 맑시즘적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에 약간 의구심을 가질 즈음 프로이트의 리비도 경제학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정치 경제학 분석을 결합함으로써 이후의 펠릭스 카타리와 함께 유물론적 성 경제학의 계보를 형성한 빌헬름 라이히의 이론이 지닌 가치는 자못 크다. 파시즘의 귀환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오늘날 "오르가즘의 기능"의 번역은 너무 늦었지만 시의적절하다. (읽어본넘 있을까?ㅎㅎㅎ 꼬리글안다는 넘들~~)
출처: 진보평론, 박정수 /수유공간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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