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 수행을 하시는 어떤 가톨릭 사제께서 쓰신 <선禪과 성서聖書>(분도 출판사)를 읽다가
참선을 수행하는 우리에게 몸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수행에 보탬이 된다 싶어 요약해서 옮겨 봅니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수행이 먼저 이성理性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무엇을 하려는 원의를 가진 후에야
<몸>으로 실행하는 즉 <이성에서 몸으로 나아가는> 수행인데 반해 선禪은 <몸에서 마음으로 나아가는>
즉 '몸 전체'로써 수행하는 방법이다.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굉장한 힘을 지니고 있는 바,
참선을 통해 온 <몸>으로 부닥쳐 본래면목에 다가가 '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혼신의 힘을 낼 수 있다.
따라서 참선 수련 인들이 <몸>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몸에 관한 현상학도 선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신심일여身心一如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현상학에 의하면 <몸>은 마음과 육신의 통일체인 <총체적 인간>을 가리킨다.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영혼이 생명을 불어넣은 몸'이라는 의미에서,
<몸>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이라고 말하는 표현이 정확한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소마(soma=몸)도 명백히 총체적 인간을 가리킨다.
우리가 눈으로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때,
그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고 우리 <몸> 전체이다.
이런 경우, '내'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 '나'는 흔히 의식의 중심인 나, 즉 정신이라고 무심코 해석되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오해'이다.
사실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단지 정신만도 아니고 육체만도 아니며,
정신과 육체의 통일체인 '나 전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오해는 풍경을 바라볼 때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보는 눈'이기 때문인데
실상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내 <몸>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보는 일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듣다, 말하다, 걷다, 먹다, 잠자다, 글을 쓰다, 읽다 등의 행위의 주역主役은 우리 육체나 정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몸>인 것이다.
'이야기한다'는 현상을 좀더 깊이 고찰해 보자. 내가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서로 마주 대하고 있는 것은 나와 상대방의 정신 또는 육체가 아니다.
오히려 내 몸과 상대방의 몸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몸이 내 말에 귀 기우려 그 입을 열어 나에게 말을 건네온다.
성의를 가지고 상대방쪽으로 육체와 얼굴을 돌려 그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때,
상대방은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말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몸 전체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몸의 이야기>가 있어야 비로소 말에 의한 대화가 나누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몸의 이야기>가 없다면, 아무리 웅변조로 유창하게 이야기 하더라도
실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내 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은 몸을 변용 시키며 점차 생동하는 '모습'이 되어 간다.
그렇게 이루어진 '모습'은 몸의 '이야기(언어言語)를 똑똑히 발음하는 분절화分節化로써
그 '이야기'를 더 명료하게 표현한다.
인격은 갖가지 행위를 통해 형성되는 만큼 사람의 삶 전체는
그 몸의 '모습'에 더욱 선명하게 각인刻印되어 드러나게 된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의 '모습'은 그 사람의 인격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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